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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름 한 병을 끝까지 제대로 쓰는 집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사서 두다 보면 향이 사라지거나 이상한 냄새가 나서 버리게 되는 경우가 꽤 생깁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 그랬습니다. 비비냉면을 만들면서 참기름을 두르는데 고소한 향 대신 텁텁하고 쩐 냄새가 올라오더라고요. 유통기한이 한참 남아 있었는데, 결국 그 병은 버렸습니다.
싱크대 바로 옆 선반에 투명 유리병째 올려두고 요리할 때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나중에야 참기름이 빛, 열, 공기에 유독 예민하다는 걸 알았는데, 그 세 가지를 전부 무시하는 보관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참기름 보관에서 냉장이냐 상온이냐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습니다. 어디에, 어떤 병에, 얼마나 자주 여느냐입니다.
참기름 보관법
참기름이 상하는 근본 원인은 산패(rancidity)입니다. 산패란 기름 속 불포화지방산이 공기 중 산소, 빛, 열과 반응해 산화되면서 맛과 향이 변질되는 현상인데, 고소한 향이 사라지고 쩐내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이미 산패가 진행된 겁니다. 산패된 기름은 가열해도 독성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참기름이 다른 식용유보다 그나마 오래 버티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영양팀 자료에 따르면 참기름에는 기름의 산패를 막아주는 리그난과 감마토코페롤 같은 항산화 물질이 함유돼 있어 일반 식물성 유지에 비해 저장성이 좋은 편이며, 개봉 후 실온에서 3개월까지 보관이 가능합니다. (삼성서울병원)
리그난(lignan)이란 참깨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항산화 물질로, 기름의 산화 속도를 늦춰줍니다. 이 성분 덕분에 참기름은 들기름과 달리 냉장 보관을 굳이 안 해도 됩니다. 들기름은 오메가 3 지방산이 많아 산패가 훨씬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냉장이 필수인데, 참기름도 들기름처럼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한동안 둘 다 냉장고에 뒀는데, 참기름이 굳고 향이 약해지는 게 반복됐습니다. 꺼내서 상온에 두면 다시 맑아지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향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더라고요.
산패된 기름은 몸속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 세포를 망가뜨리고 염증을 일으키며, 장기적으로는 발암물질로 작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코미디닷컴) 유통기한이 남아 있어도 냄새가 이상하면 버려야 하는 게 이래서입니다.
참기름 상온 보관
참기름에게 가장 나쁜 자리가 가스레인지 옆이나 싱크대 위 선반입니다. 요리할 때마다 열기와 불빛에 노출되고, 뚜껑을 열었다 닫는 횟수도 많아서 산패가 빠르게 진행됩니다. 저는 그 자리에 몇 달을 두다가 결국 향이 사라진 참기름을 버렸는데, 찬장 안쪽으로 옮긴 뒤로는 같은 기간을 두고 써도 향이 살아 있었습니다. 자리 하나 바꿨을 뿐인데 차이가 났습니다.
병 색깔도 영향을 줍니다. 투명 유리병은 빛을 그대로 통과시켜서 산패를 앞당기는데, 마트에서 판매하는 참기름이 대부분 짙은 갈색 유리병에 담겨 있는 게 이 때문입니다. 투명 병에 담긴 참기름이라면 불투명한 용기로 옮기거나, 신문지로 한 번 감싸는 것만으로도 빛 차단이 됩니다. 30초도 안 걸리는 일인데 효과는 꽤 납니다.
산화(oxidation)란 기름 속 지방 분자가 산소와 반응해 과산화물을 만드는 화학반응인데, 뚜껑을 열 때마다 조금씩 진행됩니다. 대용량을 사서 오래 쓰면 그만큼 공기에 노출되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500밀리리터를 사서 아껴 쓰다 보니 세 달이 지나도 반이 남아 있는 게 반복됐는데, 그보다 200밀리리터짜리를 자주 사는 쪽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제대로 된 향을 쓸 수 있었습니다.
참기름 소분
대용량 참기름을 살 때는 소분이 답입니다. 짙은 색 유리병에 100밀리리터씩 나눠 담고, 쓰지 않는 병은 찬장 안 서늘한 곳에 그냥 두면 됩니다. 열어둔 병은 3개월 안에 소진하고, 나머지는 닫아두는 것만으로도 산패 속도가 훨씬 느려집니다. 처음 소분을 해봤을 때 귀찮겠지 싶었는데, 작은 병은 쓰기도 편하고 큰 병을 매번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것보다 공기 접촉도 줄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향이 살아 있는 참기름을 쓰는 게 좋았습니다.
여름처럼 주방이 유독 더울 때는 소분한 예비 병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냉장고에서 꺼낸 직후에 기름이 살짝 뿌옇게 보여도, 상온에 잠깐 두면 금방 맑아지니까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발연점(smoke point)이란 기름을 가열할 때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온도인데, 참기름은 발연점이 170도로 낮습니다. 볶음이나 튀김 같은 고온 조리에 쓰면 향이 날아가고 유해 물질이 생길 수 있어서, 참기름은 열을 끈 뒤 마지막에 두르거나 무침, 비빔 요리에 쓰는 게 맞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볶음 시작할 때 참기름을 둘렀는데, 그러면 향이 다 날아가더라고요. 마지막 단계로 바꾸고 나서야 참기름 특유의 향이 요리에 살아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산패 여부는 냄새로 먼저 알 수 있습니다. 고소한 향 대신 텁텁하거나 쩐 냄새가 나면 이미 진행된 겁니다. 색이 탁해지거나 기름이 찐득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신호입니다. 병 바닥에 침전물이 보이는 건 이것과 다른데, 색과 향이 정상이라면 산패가 아니라 참깨 성분이 가라앉은 거니까 흔들어서 쓰면 됩니다. 저는 침전물을 보고 상한 줄 알고 버린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멀쩡한 참기름이었습니다. 꽤 아까운 낭비였습니다.
참기름은 보관 방법을 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맛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원래 맛이 그냥 오래 유지됩니다. 싱크대 옆에서 찬장 안으로 자리 옮기고, 큰 병 대신 작은 병으로 자주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